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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재지이

1 · [요재지이] 섭소천 (1)

[요재지이] 섭소천 (1)

금화(金華) 북쪽 성곽 밖에 오래된 절이 하나 있었다.

저물녘이었다. 전각과 탑은 제법 높이 솟았으나, 사람 키를 넘긴 잡초가 마당을 통째로 삼켰다. 오간 발자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서로 늘어선 승방은 문짝이 하나같이 헐겁게 닫혀, 바람이 지날 때마다 덜컹거렸다. 부러진 처마 끝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한 채만 달랐다.

남쪽 끝 작은 방. 그 문에만 자물쇠가 새것이었다. 무너져 가는 폐허 한가운데, 유독 반질반질한 쇠붙이 하나가 저녁빛을 되쏘았다.

영채신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을 거뒀다.

그는 절강(浙江)에서 온 선비였다. 성미가 시원시원하고 몸가짐이 발라, 없는 것을 있는 척 꾸밀 줄을 몰랐다.

재물 앞에서도 여색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내 평생 두 여자를 곁에 둔 적이 없소."

허튼 자랑이 아니었다. 그의 사람됨이 본디 그러했다.

이번에 금화까지 온 것은 볼일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마침 학사(學使)가 고을을 순시하러 내려와, 성안 객사마다 방값이 곱절로 뛰었다. 영채신은 그 값을 흥정하며 실랑이하느니, 차라리 빈 절에 몸을 붙이는 편이 낫다 여겼다.

전각 동편으로는 손아귀만 한 굵기의 대나무가 곧게 자랐고, 섬돌 아래 큰 못에는 들연꽃이 벌써 피어 있었다. 폐허라 해도 그윽하고 고요했다.

영채신은 그 한적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잡초를 헤치고 마당을 거닐며, 절을 지키는 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날이 아주 저물 무렵, 한 사내가 남쪽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영채신은 얼른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하룻밤 신세 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사내는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 절엔 주인이랄 게 없소이다. 나도 그저 잠시 얹혀사는 몸이지."

"그러면 곁방 하나 빌려도 되겠소?"

"누추한 곳을 마다 않으신다면야. 아침저녁으로 말벗이나 되어 주시오. 그거면 이쪽도 다행이오."

영채신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마른 짚단을 깔아 잠자리를 삼고, 널빤지 하나를 받쳐 책상을 만들었다.

세간이랄 것도 없는 살림이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차하면 며칠이고 눌러앉을 요량이었다.

그날 밤, 달이 유난히 맑고 높았다. 물빛 같은 달빛이 마당 가득 고였다.

두 사람은 전각 회랑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그제야 통성명을 했다.

"성은 연(燕)가요. 자는 적하(赤霞)라 하오."

사내는 그 이상 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영채신은 그가 과거를 보러 온 유생이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말소리가 아무래도 이 고장 사람 같지 않았다. 절강의 부드러운 억양과는 딴판으로, 억세고 무뚝뚝했다.

"자는 어디서 오셨소?"

"진(秦) 땅 사람이오."

"먼 길을 오셨구려. 한데 이런 빈 절엔 어찌 홀로 계시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오. 나그네에게 지난 일을 묻는 건 예가 아니지요."

영채신은 무안해져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말투에는 사람을 밀어내는 데도 모나지 않은 데가 있었다.

사내는 더 캐물을 틈을 주지 않았다. 말수가 적었으나, 그 적은 말에 꾸밈이 없어 도리어 미더웠다.

영채신은 사내의 눈길이 이따금 북쪽 어둠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너진 담과 잡초뿐이었다.

사내의 발치에는 낡은 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겉이 해질 대로 해진 물건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좀처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무엇이 들었느냐 물으려다, 영채신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기운이 사내에게 있었다.

이야기가 오갈수록, 영채신은 이 사내가 여느 나그네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여럿 남았고, 앉은 자세는 언제라도 몸을 일으킬 사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과거를 보러 온 서생의 손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 각자 방으로 돌아설 무렵, 연적하가 나직이 한마디를 던졌다.

"한밤중에 무슨 소리가 들리거든, 방문을 열지 마시오."

"소리라니, 무슨 소리 말이오?"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치의 낡은 자루를 집어 들고, 제 방 쪽으로 등을 돌렸다. 영채신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낯선 자리 탓인지, 영채신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방 북쪽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 들었다. 마치 담 하나 사이로 한 가족이 살림을 꾸리는 집처럼.

폐사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연적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방문을 열지 말라 했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이란 경고 앞에서 오히려 고개를 드는 법이었다.

영채신은 방문 대신 창을 택했다.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일으켜, 북쪽 벽 돌창 아래로 기어갔다. 숨을 죽이고 창틈에 눈을 댔다.

낮은 담 너머로 작은 뜰이 보였다. 마흔 남짓 되어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붉게 바랜 옷을 걸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등이 활처럼 굽었고, 성긴 빗을 머리에 꽂았다. 두 사람이 달빛 아래서 소곤거렸다.

"소천이는 어째 이리 안 오누."

여인이 먼저 입을 뗐다.

"이제 곧 올 때가 됐지."

노파가 받았다.

"혹 할멈한테 무슨 원망이라도 품은 게 아닐까."

"그런 내색은 없었다. 다만 요새 낯빛이 영 시무룩하더군."

"계집이 사내와 함부로 낯을 익혀선 못쓰는 법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열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소리도 없이 뜰로 들어섰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이 부실 만큼 고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고운 낯에 웃음기가 없었다.

노파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등 뒤에서 남 흉보지 말랬거늘. 우리 둘이 마침 네 이야기를 하던 참인데, 요 조그만 것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구나. 그래도 험담은 안 했으니 다행이지."

노파는 너스레를 이었다.

"우리 아가씨는 참하기도 하지. 꼭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아. 이 늙은 것이 사내였던들, 진작에 넋을 빼앗겼을 게야."

"할멈이 아니면, 누가 저더러 곱다 하겠어요."

처녀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노파의 너스레에도 그녀의 입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마지못해 이 자리에 끌려 나온 사람처럼, 그녀는 자꾸만 시선을 발치로 떨궜다.

세 여자가 다시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뒤의 말은 영채신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는 창틈에서 눈을 뗐다. 인적이 끊긴 폐사였다. 사람이 깃들 까닭이 없는 담 너머에서, 세 여자가 달빛을 받고 앉아 있었다.

그제야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저리 밝은데, 그중 누구도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다. 마당의 마른 풀 한 포기조차 제 그림자를 바닥에 뉘었건만, 세 여자의 발밑만은 텅 비어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하게 곤두섰다. 영채신은 숨을 죽인 채 물러나, 도로 자리에 누웠다.

연적하의 말이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이불깃을 끌어올리고 애써 눈을 감았다.

막 잠결로 빠져들려는 참이었다.

누군가 잠자리 곁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영채신은 벌떡 몸을 일으켜 어둠을 살폈다.

아까 그 북쪽 뜰의 처녀였다. 달빛이 그녀의 흰 얼굴 위로 미끄러졌다. 언제 들어왔는지, 문은 여전히 닫힌 채였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오."

그가 놀라 물었다. 처녀가 나직이 웃었다.

"달이 이리 밝은데 잠 못 이루시기에, 함께 정이나 나눌까 하여 왔지요."

영채신은 대번에 낯빛을 굳혔다.

"그대는 남의 입방아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나, 나는 사람들 말이 두렵소. 한 번 발을 헛디디면 염치가 땅에 떨어지오."

"이 밤에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처녀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은은한 향내가 코끝에 감겼다.

살결은 달빛보다 희었고, 눈매에는 물기가 어렸다. 웬만한 사내라면 진작 넋을 놓았을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영채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오. 그것으로 족하지 않소."

처녀는 머뭇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더 얹으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영채신의 얼굴에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썩 물러가시오. 정 아니 가겠다면 남쪽 방의 손을 부르리다."

그 말에 처녀가 흠칫 겁을 먹고 돌아섰다.

한데 문지방을 넘던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되돌아왔다. 소맷자락에서 누런 황금 한 덩이를 꺼내, 슬며시 잠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달빛 아래 금붙이가 묵직하게 빛났다.

영채신은 그것을 집어 들기 무섭게 뜰 섬돌 아래로 내던졌다.

"의롭지 못한 물건으로 내 자루를 더럽히지 마시오."

쨍, 하고 금덩이가 돌에 부딪는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처녀는 무안한 낯으로 나가 그것을 주웠다. 그러고는 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이 사람은, 쇠와 돌로 빚었구나."

그 목소리에는 원망보다 차라리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마치 오래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뜻밖의 자리에서 마주친 사람처럼.

영채신은 자리에 도로 누웠다. 이상하게도, 물리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

그 처녀의 눈매에 어리던 물기가 자꾸 떠올랐다. 사내를 홀리러 온 것치고는, 그 얼굴이 지나치게 쓸쓸했다.

그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쳤다. 곧 얕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절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난계(蘭溪)에서 온 서생 하나가 하인을 하나 데리고, 과거를 보러 이 절에 들었다. 동쪽 곁방에 짐을 풀고, 영채신과 가벼운 인사도 나누었다.

혈색 좋고 말끔한 젊은이였다. 며칠 뒤 시험장에서 실력을 겨뤄 보자며, 그는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생은 죽었다.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까닭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시신을 눕히고 살피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발바닥 한복판에, 송곳으로 콕 찌른 듯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에서 가느다란 피가 실처럼 배어 나왔다.

절 안이 술렁였다. 병으로 죽은 것도, 누구에게 맞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어제까지 멀쩡히 웃던 사람이 하룻밤 새 싸늘하게 식었다. 시신을 옮기던 이들은 그 발바닥의 구멍을 보고 하나같이 낯빛을 잃었다.

영채신은 문득 간밤에 들은 경고를 떠올렸다. 무슨 소리가 들리거든 방문을 열지 말라던, 그 나직한 목소리를.

연적하는 무언가를 알았던 사람이다. 알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룻밤이 더 지났다. 이번에는 하인이 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발바닥 한복판에 뚫린 작은 구멍. 실처럼 배어 나온 피. 자국마저 똑같았다.

두 사람 다, 젊고 건강한 사내였다.

영채신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섰다.

두 사람은 죽었고, 그는 살아 있었다. 같은 절에서, 같은 밤을 보냈는데.

간밤에, 제 잠자리에 황금을 올려놓던 그 흰 손이.

문밖으로 물러나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가.

느릿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쇠와 돌로 빚었다던 그 말이, 이제야 다르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