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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1 · 1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늘의 아들이 사람의 땅을 탐한 이야기를, 그대는 들어보았는가.

환웅은 날마다 하늘 끝에 섰다.

발아래로 구름이 흘렀다. 그 아래에 사람들이 사는 땅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몸을 웅크렸다. 비가 쏟아지면 낮은 처마 밑으로 숨었다. 병들면 앓았고, 다투면 서로를 해쳤다.

한 여인이 젖은 아이를 품에 안고 처마 밑에서 떨었다. 두 사내가 밭 한 뙈기를 두고 돌을 들었다. 늙은이 하나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여리고 서툰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자꾸 눈길이 그리로 갔다.

저 여린 것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바로잡고 싶었다. 마른 땅에 비를 뿌리고, 앓는 자를 일으키고, 다투는 손을 붙들어 나란히 세우고 싶었다.

환웅은 그 땅을 갖고 싶었다.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루만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환인은 아들의 얼굴에서 그 마음을 읽었다.

어느 날 환인이 아들을 곁에 세웠다.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 봉우리가 우뚝한 산 하나가 사람들의 땅 한가운데에 솟아 있었다.

"저 아래를 보아라. 무엇이 보이느냐."

환웅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이미 다 안다는 것을, 그 한마디로 알았다.

"매일 저곳만 봅니다."

환웅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저들은 약합니다. 비 한 줄기에 무너지고, 밥 한 그릇에 서로를 해칩니다. 그런데 그 약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환인은 오래 말이 없었다. 세 봉우리의 산을 바라보고, 다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저 땅이라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 만하다."

환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허나 묻겠다. 네가 원하는 것은 저들을 다스리는 것이냐, 이롭게 하는 것이냐."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환웅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거라."

환인은 아들에게 세 가지를 내렸다. 하늘의 표식이 담긴 것 세 개였다.

무엇에 쓰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쥔 손이 곧 하늘의 뜻을 대신한다는 것만 일렀다.

"이것을 지닌 자는 하늘을 대신해 땅을 어루만진다. 함부로 쥐어서는 안 된다."

환웅은 세 개를 두 손으로 받아 품에 넣었다. 손끝이 서늘했다.

"한번 내려가면, 너는 온전히 하늘의 것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가겠느냐."

"가겠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무리 삼천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구름을 가르고 내려섰다. 발밑으로 산이 점점 커졌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삼천의 무리 가운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모두 알았다.

마침내 발끝이 땅에 닿았다. 흙 냄새가 코끝에 밀려들었다. 하늘에서는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였다.

태백산 봉우리 위에 신단수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지가 하늘을 떠받치고, 뿌리가 땅속 깊이 뻗은 나무였다. 환웅은 그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신시라 불렀다. 신들의 저자라는 뜻이었다. 나무 아래 앉은 이를 환웅천왕이라 불렀다.

환웅은 바람을 부리는 자와 비를 부리는 자와 구름을 부리는 자를 곁에 두었다.

"마른 땅에 비를 보내라."

우사가 검은 구름을 몰았다. 갈라진 논바닥에 물이 스몄다.

"씨앗을 실어 날라라."

풍백이 바람을 일으켰다. 씨앗이 산 너머 벌판까지 퍼졌다.

볕이 따가운 날에는 운사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었다. 여린 싹이 그 그늘 아래에서 자랐다.

환웅은 곡식을 여물게 했다. 사람의 목숨을 헤아렸고, 병을 다스렸다. 죄지은 자를 벌하고, 옳고 그름을 갈랐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갖 일이 그의 손을 거쳤다. 삼백예순 가지가 넘는 일이었다.

땅이 조금씩 달라졌다.

굶어 죽던 자가 배를 채웠다. 병으로 눕던 자가 일어나 걸었다. 어제 돌을 들고 다투던 두 사내가, 오늘은 나란히 밭을 갈았다.

한 어미가 앓던 아이를 안고 신단수를 찾아왔다. 아이가 밤새 열에 시달렸다고 했다.

환웅이 손을 얹자 아이의 이마가 식었다. 어미는 나무 아래에 엎드려 오래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우러렀다. 환웅은 우러름을 바라고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여린 것들이 조금 덜 아프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 소문은 사람에게만 닿지 않았다.

산속 깊은 굴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함께 살았다.

둘은 저녁마다 신단수 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서 짐승이 사람이 되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손과 사람의 말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고 했다.

곰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렸다.

짐승의 삶은 굴 하나가 전부였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배부르면 잠들었다. 그뿐이었다.

곰은 그 이상을 원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이상이, 밤마다 가슴을 눌렀다.

"우리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곰이 어느 밤 호랑이에게 물었다.

"안 될 것도 없지."

호랑이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사람이 되면 더 잘 사냥하겠거니 여기는 눈치였다.

곰의 바람은 달랐다. 곰은 사냥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굴 밖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어느 밤, 둘은 굴을 나섰다. 신단수 아래에 이르러 나란히 엎드렸다.

"저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환웅은 오래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짐승의 눈 속에, 짐승의 것이 아닌 간절함이 있었다.

그는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내주었다.

"이것을 먹어라. 그리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마라."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물었다.

"그 시간을 견디면, 사람의 몸을 얻으리라."

둘은 쑥과 마늘을 안고 굴로 돌아갔다.

굴 안은 어두웠다. 빛 한 줄기 들지 않았다.

쑥은 썼다. 마늘은 혀를 태웠다. 씹을 때마다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호랑이가 먼저 몸을 뒤척였다.

"배가 고프다. 이런 걸로는 살 수가 없어."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쑥을 한 입 더 물었다.

"바깥에 나가면 사냥할 짐승이 널렸는데. 왜 이 어둠 속에서 굶어야 하지?"

호랑이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며칠이 더 흘렀다. 호랑이는 점점 자주 굴 입구 쪽을 흘끔거렸다. 그 너머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호랑이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이 되면 뭐가 달라지는데? 나는 지금 이대로도 산에서 가장 강해. 여기서 굶어 죽느니 나가서 사냥을 하겠다."

곰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견디자. 여기서 나가면 우리는 그냥 짐승으로 죽어."

"나는 짐승으로 사는 게 부끄럽지 않아."

호랑이는 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이내 사라졌다.

굴에는 곰 혼자 남았다.

혼자가 되자 어둠이 한층 짙어졌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제 숨소리뿐이었다.

곰은 눈을 감았다. 쑥의 쓴맛에 기대어 하루를, 또 하루를 견뎠다. 날을 세는 일마저 어둠 속에서는 흐려졌다.

굶주림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몇 번이나 굴 밖의 빛이 그리웠다.

사냥하던 밤이, 갓 잡은 짐승의 더운 피가 떠올랐다. 살아 있는 짐승을 쫓던 그 힘찬 다리가 그리웠다.

한번은 저도 모르게 굴 입구까지 걸어갔다. 빛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끝이었다.

곰은 그 자리에 멈췄다.

여기서 나가면, 나도 호랑이와 같아진다.

곰은 뒷걸음질 쳤다. 다시 어둠 속으로, 더 깊은 곳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빛을 보면 지금까지 견딘 모든 날이 사라진다. 곰은 그것만을 붙들었다.

몸이 자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러다 사람이 되기 전에 숨이 다할 듯했다.

그래도 곰은 눈을 감은 채 버텼다. 죽더라도 짐승으로는 죽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스무하루째 되던 날이었다.

곰의 몸이 뜨거워졌다. 두꺼운 털이 스르르 빠졌다.

굽은 등이 곧게 펴지고, 발톱이 오그라들었다. 그 자리에 사람의 손이 돋았다.

굴 바닥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제 손을 들어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열 개가 가지런히 움직였다. 처음 가져 보는 손이었다.

그 여인을 웅녀라 불렀다.

웅녀는 굴을 나섰다. 처음으로 두 발로 걸었다. 처음으로 햇빛을 눈으로 받았다.

세상은 눈부셨다. 그러나 그 눈부심 속에서 웅녀는 이내 혼자였다.

사람이 되었으나, 사람들 사이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낯선 여인을 곁눈질했다. 어디서 왔느냐 물으면, 웅녀는 답할 말이 없었다.

굴에서 왔다고, 곰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아비와 자식이 있었다. 저녁이면 한 지붕 아래로 모여들었다.

웅녀에게는 돌아갈 지붕이 없었다. 짝을 지을 이도, 곁을 내줄 이도 없었다.

웅녀는 사람의 몸을 얻고서야 사람의 외로움을 배웠다. 짐승일 적에는 굴 하나로 족했다. 사람이 되고 나니, 마음 하나 기댈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웅녀는 날마다 신단수 아래로 갔다.

그 아래에 엎드려 빌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비는 기도였다.

품에 안을 하나를 달라고. 저를 어미라 부를 하나를 달라고.

빈 나무 아래에서 울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환웅이 그 울음을 들었다.

그는 잠시 사람의 몸을 빌렸다. 하늘의 아들이 땅의 여인 곁에 내려섰다.

웅녀는 아이를 뱄다. 열 달이 차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곰이었던 어미와, 하늘이었던 아비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어둠을 견딘 피와, 하늘을 다스린 피가 그 한 몸에서 만났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아이는 어미의 인내와 아비의 뜻을 함께 지녔다. 여린 것을 지나치지 못했고, 옳고 그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곰이 굴에서 견딘 스무하루가, 그 핏줄 속에 흘렀다.

단군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던 무렵,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세웠다. 그 나라를 조선이라 이름했다.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그 이름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가 섰다.

하늘에서 내려온 뜻과, 어둠을 견딘 짐승의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만나 세운 나라였다. 누구도 그 앞에 나라를 세운 적이 없었다.

단군은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 세월이 천오백 년에 이르렀다.

먼 훗날, 중원에 새 임금이 서고 기자라는 이가 조선 땅에 봉해졌다. 단군은 다투지 않았다. 조용히 자리를 비켜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사달로 돌아갔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산의 신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천구백여덟이었다.

신단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지는 하늘을 떠받치고, 뿌리는 땅속 깊이 뻗어 있었다. 그 나무 아래에서 하늘과 땅이 처음 만났고, 짐승이 사람이 되었으며, 한 나라가 태어났다.

여기까지가 이 땅에 나라가 처음 선 이야기다.

그러나 나라는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땅은 셋으로 갈렸고, 저마다 하늘을 이었노라 말하는 자들이 나섰다.

그 셋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