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의 약속] 1화. 벽 너머의 병자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몬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옛일과 요즘 일을 두런두런 나누며 흥이 오르던 자리였다.
"저건 무슨 소리요."
같은 마을 이웃이 낯빛을 흐렸다.
"며칠 전부터 묵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서쪽 지방 사람인 듯한데, 일행에 뒤처졌다며 하룻밤만 재워 달라기에 들였지요."
말끝이 무거워졌다.
"무인의 기품이 있어 천한 자는 아니다 싶었소. 그런데 그날 밤부터 열이 끓어 몸을 제 뜻대로 못 가눕니다. 딱해서 사나흘 두고 보았는데, 어디 사람인지도 모르니 이제 와 후회가 되는군요."
사몬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세베 사몬은 하리마 가코에 사는 가난한 선비였다. 벗이라곤 책뿐이요, 세간 살림 늘어놓는 것을 번거로워했다. 늙은 어머니가 길쌈으로 그의 뜻을 도왔고, 넉넉한 처가에서 무엇을 보내와도 입에 풀칠하자고 남을 성가시게 하랴며 받지 않았다.
벽 너머의 신음이 다시 가늘게 이어졌다.
"딱한 이야기로군."
사몬이 몸을 일으켰다.
"주인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당연하오. 허나 낯선 하늘 아래 홀로 병을 앓는 사람이라면 그 가슴이 오죽하겠소. 내가 한번 봐야겠소."
주인이 다급히 팔을 붙들었다.
"역병은 사람을 옮긴다 합디다. 집안 아이들도 얼씬 못 하게 했어요. 가까이 갔다 화를 입지 마시오."
사몬이 웃었다.
"죽고 사는 데엔 정해진 명이 있소. 무슨 병이 사람을 골라 옮긴단 말이오. 그런 건 무지한 자들의 말이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그는 붙드는 손을 가만히 떼어 놓고, 문을 밀고 들어섰다.
과연 주인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예사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병이 깊었다. 낯빛은 누렇고 살갗은 검게 야위었다.
낡은 이불 위에서 몸을 뒤척이던 사내가, 사람이 그리운 눈으로 사몬을 올려다보았다.
"물…… 더운물 한 모금만."
사몬은 곁에 다가앉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불덩이 같았다.
"염려 마시오. 내가 반드시 살려 드리리다."
그는 주인과 의논해 약을 골랐다. 손수 처방을 짜고 손수 달였다. 데운 물을 조금씩 흘려 넣고, 식은땀을 닦았다.
그날 밤이 고비였다.
열이 극에 달해 사내는 헛소리를 뱉으며 몸을 떨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들을 부르다가, 이따금 칼을 쥐듯 허공을 움켜쥐었다.
사몬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손발을 주무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등잔 기름이 다 닳도록 그는 낯선 사내의 머리맡을 지켰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했다. 그뿐이었다.
이웃집 아이들이 문틈으로 기웃대다 달아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새벽녘, 사내의 숨결이 조금 고르게 돌아왔다.
주인이 사몬의 밤샘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선비님이 아니었으면 벌써 초상이 났을 게요."
사몬은 대꾸 없이 새 물을 데우러 일어섰다.
이튿날에도 그는 걸음했다. 그다음 날에도 그리했다. 쓴 약을 손수 식혀 떠 넣고, 미음을 끓여 입에 대 주기를 제 핏줄 돌보듯 했다.
"떠도는 나그네에게…… 이토록 은혜를."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사내가 눈물을 비쳤다.
"죽어서라도 그 마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기운도 없으면서 그런 말은 마시오."
사몬이 미음 그릇을 내려놓았다.
"돌림병에는 다 날수가 있소. 그 고비만 넘기면 목숨을 잃지 않지. 내가 날마다 들르리다."
빈말이 아니었다. 사몬은 말한 그대로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때로는 제 끼니를 잊고 약재를 구하러 이웃 마을까지 걸음했다.
열이 조금씩 물러가고, 며칠이 지나자 누렇던 낯에 옅게나마 핏기가 돌았다.
열흘이 지날 무렵, 사내는 마침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윈 손을 짚고 사몬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목숨을 주우신 은혜, 이 몸이 잊지 않겠습니다."
"자꾸 은혜를 말하니 도리어 내가 무안하오."
사몬이 웃으며 이불깃을 여몄다.
"어서 기운이나 차리시오. 그거면 되오."
기력이 조금 돌아오자 사내가 문득 물었다.
"실례지만, 선비님은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십니까."
"책을 벗 삼아 몇 자 가르치는 것이 전부요. 보시다시피 가진 것 없는 살림이오."
사내는 한동안 사몬의 낡은 소매를 바라보았다.
"없는 살림에 남을 이토록 거두다니. 더욱 갚을 길이 아득합니다."
"갚을 것을 미리 셈하며 사람을 살리는 이가 어디 있겠소."
사몬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몸을 추스른 사내는 주인에게도 정성껏 사례했다. 그러고는 사몬의 남모를 덕을 거듭 고마워하며, 비로소 제 신상을 털어놓았다.
"저는 본디 이즈모 땅 마쓰에에서 나고 자란 아카나 소에몬이라 합니다."
사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말씨에는 과연 배운 티가 배어 있었다.
"병법을 조금 익힌 것이 인연이 되어, 도미타성의 성주 엔야 가몬노스케께서 저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셨지요. 한데 제가 오미의 사사키 우지쓰나께 밀사로 뽑혀 그 저택에 머무는 사이에, 변이 났습니다."
소에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쫓겨났던 옛 성주 아마코 쓰네히사가 산나카 무리를 끌어들여, 섣달 그믐밤에 느닷없이 성을 들이쳤습니다. 엔야 님은 그 싸움에서 돌아가셨고요."
"그럼 그대는 주군을 잃은 것이오?"
"이즈모는 본래 사사키의 땅이고, 엔야 님은 그 대리로 성을 지키던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사키께 청했지요. 군사를 내어 아마코를 치자고."
소에몬이 씁쓸하게 웃었다.
"한데 그자는 겉으로만 용맹할 뿐 속은 겁먹은 어리석은 장수였습니다. 끝내 움직이지 않았지요. 오히려 저를 제 땅에 붙들어 두더군요."
"까닭 없는 곳에 오래 머물 뜻이 없어, 몸 하나 빼내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병을 얻은 겁니다."
사몬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를 아는 이가 그런 자들 틈에서 고초를 겪었구려. 세상이 어지러운 탓이오."
소에몬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뜻밖에 은인을 성가시게 해 드렸습니다. 이 남은 목숨을 다해 반드시 갚겠습니다."
"눈앞의 딱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오."
사몬이 담담히 말했다.
"두터운 말은 거두시오. 몸이나 마저 추스르시오."
날이 갈수록 소에몬은 예전의 기력을 되찾았다.
사몬은 좋은 벗을 얻었다 여겨 밤낮으로 그와 마주 앉았다. 등불을 사이에 두면 이야기가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소에몬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백가를 두루 짚고, 병략의 이치를 논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사몬이 책에서 미처 풀지 못한 대목을 물으면, 소에몬은 싸움터에서 몸으로 겪은 말로 되돌려 주었다.
"글은 이치를 가르치지만, 이치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사람이지요."
그 말에 사몬은 무릎을 쳤다.
어느 밤은 옛 병법의 한 대목을 두고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사몬이 책의 구절을 들면, 소에몬은 실제 진을 친 이야기로 받아쳤다. 한참을 다투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여러 밤이 흘렀다. 오래 홀로였던 두 사람의 방에 오랜만에 웃음이 잦았다.
사몬은 문득 생각했다. 얕은 사귐은 봄버들처럼 무성해도 가을 찬바람 한 번에 스러지고 만다. 이런 벗을 얻는 일이 어디 흔하겠는가.
밤이 깊어 등불 심지가 사위어 갈 무렵, 소에몬이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부모를 여읜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군마저 잃고 나니, 이 넓은 땅 어디에도 발 붙일 데가 없더군요."
사몬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또한 벗이 없었습니다."
그가 나직이 답했다.
"어머니는 늙어 가시고, 배운 것은 때를 못 만났지요. 밤마다 책을 펴 놓고도 마음 나눌 이 하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한 가지도 어긋나는 데가 없었다. 서로 감탄하고 서로 기뻐하다, 마침내 형제의 의를 맺기로 했다.
서로의 나이를 물어 위아래를 정하고, 한 잔 술을 나누어 하늘과 땅에 형제 됨을 고했다. 다섯 살 위인 소에몬이 형이 되었다.
오래 홀로 떠돌던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가 예를 갖추어 사몬에게 말했다.
"아우의 노모께서 곧 내 어머니시네. 새로이 절을 올리고 싶은데, 이 마음을 받아 주시겠는가."
사몬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늘 제 외로움을 근심하셨습니다. 이 참된 말을 들으시면 도리어 수명이 늘어나실 겁니다."
그는 소에몬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베틀에 앉아 있던 노모가 손을 멈추고 반겨 맞았다.
"내 아들이 재주가 모자라 배운 것이 때를 못 만나고, 출셋길도 잃었네. 부디 저버리지 말고 형으로서 이끌어 주시게."
소에몬이 절하고 답했다.
"대장부는 의를 무겁게 여깁니다. 공명이며 부귀 따위는 말할 것이 못 되지요."
그의 목소리가 잔잔했다.
"이제 어머님의 사랑을 입고 아우의 공경을 받으니, 이보다 더한 바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노모의 눈가가 붉어졌다.
"먼 길에 몸을 상한 사람을 우리 아이가 거두더니, 이런 인연이 되는구려. 이 집이 누추하나 제집으로 여겨 주시게."
그 밤, 늙은 어머니는 오래 비어 있던 아들의 형 자리를 채운 사람에게 손수 상을 차렸다. 세 사람이 둘러앉은 밤은 늘 짧았다.
소에몬은 낮이면 사몬의 글 읽는 소리를 곁에서 들었고, 노모가 실을 자을 때면 옛 싸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적적하던 집에 사람 소리가 돌았다.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산봉우리의 꽃이 다 지고, 서늘한 바람이 물결에 실려 왔다. 여름의 문턱이었다.
하루는 소에몬의 낯빛에 근심이 어렸다. 그가 모자를 마주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오미로 달아나 있던 것도 실은 이즈모의 정세를 살피려던 뜻이었습니다. 한 번 다녀와서, 종처럼 물이라도 길어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가 사몬을 보았다.
"지금은 이 이별을 허락해 주게."
사몬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럼 형님은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세월은 빠르네. 늦어도 이 가을은 넘기지 않을 걸세."
"가을이라면, 어느 날을 정해 기다리면 됩니까."
사몬이 바투 다가앉았다.
"부디 날을 약속해 주십시오."
소에몬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중양절, 구월 구일로 하지. 그날 돌아오겠네."
"형님, 그날을 결코 어기지 마십시오."
사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국화 한 가지를 꺾어 꽂고, 술을 데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곁에서 듣던 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화 피는 날이라니 잊을 리 없겠구려.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시게."
두 사람은 서로 참된 정을 다해 작별했다.
사몬은 마을 어귀까지 형을 배웅했다. 소에몬은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어 뒤를 돌아보다, 이윽고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 뒷모습이 버드나무 그늘에 잠기더니,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사몬은 형이 사라진 길목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그는 담장 밑 국화가 봉오리 맺는 것을 날마다 헤아렸다.
구월 구일. 국화가 필 무렵.
그날 형은 저 길로 돌아온다. 사몬은 그렇게 믿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