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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1 · 1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밤

1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밤

천둥이 갈라졌다.

어둠 속에서 푸른 용이 솟구쳤다. 수염을 곤두세우고, 발톱을 세운 채 곧장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홍 판서는 눈을 떴다.

이불깃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꿈이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조판서 자리에 오른 뒤로도 이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조정에서 물망을 한 몸에 받는 그였지만, 이 밤만큼은 한낱 사내에 지나지 않았다.

귀한 자식을 얻으리라.

그 생각이 들자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버선도 신지 않은 채 내당으로 향했다.

부인 유씨가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홍 판서가 다가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유씨의 낯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상공께서 체위가 존중하신 분이거늘, 젊은 사람이나 할 법한 경박한 짓을 하려 하십니까. 첩은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손을 뿌리치고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홍 판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외당으로 나오는 내내 부인의 매정함이 가슴에 얹혔다. 헛기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용꿈까지 꾸었건만, 정작 그 꿈을 받아 줄 이가 곁에 없었다.

그때 시비 춘섬이 차를 올리러 들어왔다.

열여덟, 조용한 눈매를 가진 아이였다. 방 안은 비어 있었고, 밤은 깊었다.

그 밤, 협실의 문이 닫혔다.

그날 이후 춘섬은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다른 사내를 마음에 둘 뜻도 두지 않았다.

홍 판서는 그런 춘섬을 기특히 여겨 첩으로 들였다.

그달부터 태기가 있었다. 안채 여종들 사이로 은근한 수군거림이 돌았다.

용꿈 이야기가 벌써 담을 넘어 퍼진 뒤였다. 그 귀한 꿈이 정실이 아니라 시비의 몸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소문이었다.

유씨 부인의 귀에도 그 말이 들어갔다. 그날 이후 부인의 방문은 조금 더 자주 닫혔다.

열 달이 차자 아이가 태어났다. 울음소리부터 우렁찼다.

산파가 강보를 걷다 말고 멈칫했다. 기골이 예사롭지 않았다. 눈빛부터가 갓난아기의 것 같지 않았다.

홍 판서는 그 아이를 안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영웅호걸의 상이었다.

그러나 기쁨 한쪽에는 무거운 것이 있었다. 이 아이가 부인의 몸에서 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들의 이름은 길동이라 지었다.

같은 지붕 아래, 정실 소생 인형은 이미 몇 해 먼저 태어나 있었다. 적장자였다.

길동의 자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형의 그늘 아래, 이름이 있어도 부를 수 없는 자리였다.

명절이면 사당 앞에 온 집안이 모였다. 인형은 아버지 곁에 서서 절을 올렸다.

길동은 늘 댓돌 아래, 종들 틈에 섰다. 누구도 그 자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 길동만이 매번 그 줄의 경계를 알아차렸다. 누구도 그어 놓지 않은 선이었으나,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다.

여섯 살 무렵까지는 그래도 형제가 마당에서 함께 팽이를 돌리던 때가 있었다. 인형은 길동을 아우라 불렀다.

나이가 들수록 그 부름도 줄어들었다. 어른들의 눈치가 둘 사이에 조금씩 끼어들었다.

여덟 해가 흘렀다.

서당 훈장이 붓을 내려놓고 감탄했다.

"이 아이의 글씨는 스무 살 선비를 넘어섭니다."

홍 판서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러다 이내 굳었다.

훈장의 눈길이 옆자리, 적자 인형에게로 옮겨 갔다. 인형의 글씨는 나이답게 평범했다. 비교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길동은 하나를 들으면 백을 알았다. 서책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병서를 몰래 펴 놓고 밤늦도록 읽는 날도 있었다. 활 쏘는 법, 진법을 그린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외웠다.

정작 그 재주를 어디에도 쓸 수 없다는 것을, 길동은 어렴풋이 알았다.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문반도 무반도 그에게는 애초에 닫힌 문이었다. 재주가 쌓일수록 그 문은 더 또렷이 보였다.

사랑채를 드나드는 손님들이 감탄할 때마다 홍 판서의 어깨가 으쓱했다. 그럴 때마다 웃음 끝은 씁쓸했다.

근본이 천생이었다.

행랑채 앞마당에서는 무예 훈련하는 군졸들의 기합 소리가 매일같이 울렸다. 길동은 담 너머로 그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하루는 늙은 군교가 길동에게 목검을 쥐여 주었다. 장난삼아 시켜 본 자세였다.

길동이 자세를 잡자 군교의 눈이 커졌다.

"공자님, 이 자세는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보고 따라 했을 뿐입니다."

군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공자님 같은 재주는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그날 이후로 군교는 슬그머니 진법 그림 몇 장을 길동의 손에 쥐여 주고는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그 소문이 안채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홍 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는 척했다.

속으로는 흐뭇함과 곤란함이 함께 일었다. 재주는 감출수록 드러나는 법이었다.

만약 저 아이가 정실의 몸에서 났더라면,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가 이내 지워졌다. 소용없는 가정이었다.

세상의 법도가 그러했다. 재상 한 사람의 마음으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당에서 유씨 부인은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표정이 굳었다. 길동이 인사를 올려도 눈길을 오래 주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부인은 늘 인형만 앞세워 소개했다. 길동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아이처럼 지나쳐졌다.

길동도 그 시선의 순서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하루는 길동이 마당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손님 몇이 사랑채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

홍 판서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어허. 어디서 그런 말버릇이냐."

길동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입을 다물었다. 손님 중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누군가는 짐짓 다른 곳을 보았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 매서웠다. 열 살이 넘도록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

종들도 그를 함부로 대했다.

"게 있느냐."

길동이 부르면 대답이 늦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눈을 내리깔고 턱짓만 했다.

몸종의 자식이라는 말이 뒤통수에 꽂히는 날이 잦았다. 시비 소생이라는 이유 하나였다.

길동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를 악물었다.

같은 나이 또래 종의 자식들도 길동 앞에서만은 턱을 들었다. 재상가의 핏줄이되, 재상가의 자식은 아니었다.

가슴 밑바닥에 무언가 켜켜이 쌓여갔다.

추구월 보름께였다. 달이 유난히 밝고 바람은 스산해 사람의 속을 흔드는 밤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담장 너머로 이어졌다. 서당 창호지에 달그림자가 비쳤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 번 울리다 그쳤다. 집 안은 온통 잠들어 있었다.

길동은 서당에서 책을 읽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해 전 겨울, 처음으로 아버지라 불렀다가 종아리를 맞은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달이 밝았다.

서안을 밀쳤다.

대장부로 세상에 나 공맹의 도를 잇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병법을 배워 대장인을 허리에 차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우리라.

이름을 만대에 빛내는 것이 사내대장부의 쾌사이거늘.

나는 어찌하여 이토록 외로운가.

부모형제가 버젓이 있는데도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듯하다.

길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뜰로 내려갔다. 달빛 아래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마침 홍 판서도 달빛을 보러 나와 있었다.

아들이 홀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검을 놓지 못하는 뒷모습에서 무언가가 읽혔다.

그가 다가가 불렀다.

"네가 무슨 흥이 있어 이 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느냐?"

길동이 검을 거두고 몸을 숙였다.

"소인이 마침 달빛을 사랑하여 그러합니다."

홍 판서가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짐짓 물었다.

"그뿐이냐."

길동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달빛이 아이의 젖은 눈가에 내려앉았다.

그러다 무릎을 꿇었다.

"하늘이 만물을 낼 때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였으나, 소인에게는 그 귀함이 없습니다.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길동은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소인이 평생 서러운 것은, 대감의 정기를 받아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음에도, 그 부친을 부친이라 부르지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홍 판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렸다.

이 아이가 옳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몇 해 전부터 짐작해 온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뜻을 받아주면 아이의 마음이 방자해질까 두려웠다. 재상가의 체통이 먼저 떠올랐다. 종들의 눈, 부인의 낯빛, 문중 어른들의 입방아까지 한꺼번에 스쳤다.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재상가에 종의 몸에서 난 자식이 너 하나뿐이더냐. 어찌 이리 방자하냐. 다시 이런 말을 입에 담으면 내 앞에 서지도 못하게 하리라."

길동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엎드려 울 뿐이었다.

"물러가라."

길동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무거웠다.

홍 판서는 아들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한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았다. 아이를 달래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언젠가 저 아이의 재주를 세상에 내놓을 길이 있을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 밤은 아니었다.

그는 하늘의 달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무거운 걸음으로 사랑채로 돌아갔다.

길동도 제 침소로 돌아왔다. 발끝에 채는 자갈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춘섬이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아들의 얼굴빛을 보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길동은 고개를 저었다.

춘섬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아들의 어깨를 오래 쓸어 주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녀도 짐작했다.

시비의 몸에서 났다는 것, 그 하나가 아들의 평생을 옭아맬 것을 알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손길에도 길동의 가슴 안쪽은 풀리지 않았다.

길동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불에 몸을 눕혔다. 잠은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창호지 너머로 새벽빛이 희미하게 번질 때까지 뜬눈이었다.

닭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마당 쓰는 빗자루 소리가 이어졌다.

집 안은 여느 날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도, 그제도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길동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덟 살 때부터 참아 온 말이 있었다. 열 살이 되어도, 앞으로 몇 해가 더 지나도 참아야 할 말이었다.

아버지, 그리고 형.

그 두 글자가 오늘 밤도 목 안에 걸려 있었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다.

그 밤 길동이 무슨 결심을 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