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왕후의 상, 멸문의 화
초란은 방문을 닫았다.
등잔불이 가늘게 떨렸다. 바깥에서는 늦은 벌레 울음이 이어졌다.
무녀 앞에 낮은 목소리로 앉았다.
"내 한 몸 평안하려면, 길동을 없애야 한다."
무녀의 눈이 반짝였다.
"방도가 있습니다."
초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오래 기다려 온 웃음이었다.
"흥인문 밖에 용하다는 관상녀가 있다지. 그를 이용하면 어떻겠느냐."
무녀가 손뼉을 쳤다.
"상공께 천거하여 전후사를 다 아는 듯 말하게 하십시오. 상공이 반드시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그 틈을 타면 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무녀는 초란의 방을 나섰다. 초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같은 밤, 길동은 어머니의 방문 앞에 섰다.
손끝이 문고리 위에서 떨렸다.
문을 열자 춘섬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길동은 그 앞에 엎드려 울며 아뢰었다.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몸을 낮췄다.
"소자가 모친과 전생의 연분이 중하여 금세에 모자가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망극하옵니다."
"그러나 소자의 팔자가 기박하여 천한 몸으로 태어났으니, 품은 한이 깊습니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남의 천대를 받고는 살 수 없사옵니다. 모친 슬하를 떠나려 하오니, 부디 소자를 염려치 마시고 귀체를 보중하소서."
목소리가 끝내 갈라졌다.
춘섬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두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재상가에 천한 몸에서 난 자식이 너뿐이 아니거늘, 어찌 그런 마음을 내어 어미의 간장을 태우느냐."
길동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산은 천한 몸에서 났으되, 열세 살에 어미를 떠나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이름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소자도 그를 본받고자 하오니, 모친은 안심하시고 후일을 기다리소서."
"근래 곡산모의 행색을 보니, 상공의 총애를 잃을까 하여 저희 모자를 원수처럼 여기는 듯합니다. 큰 화를 입기 전에 나가려 하오니, 부디 염려치 마소서."
춘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들의 손을 붙잡고 소리 없이 울 뿐이었다.
여덟 살 무렵, 어미 무릎을 베고 잠들던 밤들이 있었다. 그때는 세상이 이토록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 아이가 제 발로 그 무릎을 떠나겠다 말했다.
춘섬은 아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손끝이 뺨을 지날 때마다 숨을 삼켰다.
등잔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 위에 길게 늘어뜨렸다.
곡산모, 그것이 초란의 다른 이름이었다.
본래 곡산 기생 출신으로 홍 판서의 총애를 입어 첩이 되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곧장 참소했다.
몇 해 전 안채에 들어올 때만 해도 총애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총애는 조금씩 옅어졌다.
부인은 여전히 정실의 자리를 지켰고, 춘섬은 아들을 낳아 그 존재만으로 빛났다. 초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 종들도 그런 초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누구 하나 그녀 앞에서 편히 말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늘 걸렸다. 춘섬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나날이 총애를 더 받았다.
시기심이 뿌리부터 자라났다.
며칠 전에도 홍 판서가 사랑채에서 길동의 글씨를 자랑하는 것을 초란은 문틈으로 지켜보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밤, 초란은 무녀에게 은자 오십 냥을 쥐여 보냈다.
무녀는 하직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홍 판서가 내당에서 부인과 함께 길동의 비범함을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한 여자가 들어와 문안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대는 누구인데 무슨 일로 왔는가."
"소인은 관상을 보는 사람이온데, 마침 상공 문하에 이르렀나이다."
홍 판서는 반가운 마음에 길동을 불러오게 했다. 관상녀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놀란 기색을 띠었다.
"이 공자의 상을 보니 천고의 영웅이요 일대의 호걸입니다. 다만…"
말을 흐리며 주저했다.
"다만, 무엇인가. 바른대로 이르라."
관상녀는 좌우를 물리고서야 입을 뗐다.
"흉중에 조화가 무궁하고, 미간에 산천의 정기가 서려 있으니, 참으로 왕후의 기상이옵니다. 장성하면 장차 멸문지화를 당하실 것이니, 상공은 부디 살피소서."
말이 끝나자 관상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들지 않았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부인의 손에서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홍 판서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관자놀이에 힘줄이 섰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팔자는 도망키 어려우나, 너는 이 말을 누설치 말라."
은자 몇 냥을 쥐여 관상녀를 돌려보냈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그는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부인 역시 핏기 가신 얼굴로 굳어 있었다.
그날 밤, 부인은 홀로 등잔 앞에 앉아 낮의 그 말을 곱씹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문밖에서는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지나갔다.
왕후의 기상이라니.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그녀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길동은 산정으로 옮겨졌다. 홍 판서는 아들의 일거일동을 엄히 살피게 했다.
산정은 외따로 떨어진 별당이었다. 창밖으로 산 그림자만 짙게 드리웠다.
길동은 그 처사가 서러웠다. 그러나 달리 길이 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육도삼략을 읽고 천문지리를 짚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낮에는 별을 그리고, 밤에는 병법을 외웠다. 그 안에서만은 서러움도 잠시 잊혔다.
어느 날은 마당에 나뭇가지로 진법을 그려 보았다. 팔문금쇄진, 책에서 본 그대로였다.
한 걸음씩 옮겨 가며 진의 형세를 몸으로 익혔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수련이었다.
발자국마다 흙바닥에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다음 날이면 종들이 쓸어 지워 버렸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찾아오는 이는 밥을 나르는 종뿐이었다.
여름이 가고 마당의 나뭇잎이 붉게 물들었다.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흔드는 날도 있었다.
말동무 하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럴수록 책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가끔 담 너머로 명절 풍악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다. 집안 잔치에 저는 부름조차 받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붓끝을 더 세게 눌렀다.
정작 홍 판서는 가끔 산정 담장 밖에서 아들의 그림자를 오래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그 사실을 길동은 알지 못했다.
그 발걸음에는 늘 무거운 침묵이 따라붙었다.
"이 아이가 본래 재주가 있으니, 만일 분수에 넘는 뜻을 품으면 상녀의 말과 같으리라.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홍 판서는 그렇게 되뇌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초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녀와 관상녀를 매수해 이미 홍 판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였다.
천금을 뿌려 자객을 구했다. 이름은 특재.
살인을 밥 먹듯 해 온 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일전 관상녀가 아는 일이 귀신같지 않습니까. 길동의 일을 어찌 그저 두고 보십니까. 소첩도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옵니다."
초란의 목소리는 근심스러운 듯했지만, 눈빛만은 차분했다.
홍 판서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일은 내 마음에 있으니, 너는 번거로이 굴지 말라."
말은 그렇게 물리쳤으나, 마음은 갈수록 어지러웠다. 밤마다 잠을 설치더니 끝내 병이 되었다.
관상녀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대로 아들을 해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수라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부인과 좌랑 인형이 근심에 어쩔 줄 몰랐다. 초란이 그 곁에서 조용히 말을 얹었다.
며칠째 이어진 간병으로 부인의 눈 밑도 검게 그늘져 있었다.
밤이 깊도록 세 사람의 그림자가 병풍 위에 어른거렸다.
인형은 어릴 적 아우라 부르며 함께 놀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억조차 무겁게만 느껴졌다.
인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의 환후가 이러하시니, 소자도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초란이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았다.
"상공의 병환이 위중하심은 길동을 두신 까닭이옵니다. 그 아이를 없애면 병환도 나으시고 가문도 지킬 것인데, 어찌 생각지 않으십니까."
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러하나 천륜이 지중하거늘, 차마 어찌 그리하겠느냐."
말은 그리하면서도, 부인의 눈은 초란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듣자오니 특재라는 자객이 있어, 사람 죽이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 한다 합니다. 천금을 주어 밤에 들여보내면, 상공이 아신들 손쓸 도리가 없을 것이니 부인은 다시 생각해 보소서."
부인과 인형은 눈물을 흘렸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리고 잦아들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부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마 못 할 일이나, 나라를 위함이요, 상공을 위함이요, 가문을 위함이다. 네 뜻대로 하여라."
초란은 그 밤으로 특재를 불러 다시 일렀다. 오늘 밤 안으로 해치우라 일렀다.
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이 짙어지기를 기다렸다.
품삯을 미리 받은 자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밤이 깊자 특재는 담을 넘었다. 비수 한 자루를 품에 숨긴 채였다.
행랑채를 지나 산정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 죽이는 일이 익숙한 자였다.
풀벌레 소리마저 그가 지나가는 순간엔 뚝 끊겼다.
개 짖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온 집안이 그의 편인 듯 고요했다.
산정 가까이 다가설수록 그의 걸음이 오히려 느려졌다. 방 안에 누런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아직 깨어 있다는 뜻이었다.
특재는 잠시 멈춰 서서 문틈을 살폈다.
그림자 하나가 촛불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어렴풋이 비쳤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곧 결심한 듯 발을 옮겼다.
산정의 방, 길동은 그 원통함을 삭이지 못한 채 촛불 아래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다. 촛불만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의 명이 지엄하니 함부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아 주역을 짚으며 마음을 달래던 참이었다.
그때, 까마귀 울음이 세 번 들리고 멀어졌다.
원래 밤을 꺼리는 짐승이었다.
이상하다.
길동은 팔괘를 벌여 짚어 보았다. 낯빛이 순식간에 굳었다.
서안을 밀치고 둔갑법을 준비했다. 방 안의 기운을 가다듬으며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숨소리를 죽였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렀다.
촛불 그림자가 벽 위에서 일렁였다. 마루 어딘가에서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길동의 손이 서책 위에서 멈췄다.
사경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문살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숨을 멈추었다.
시간이 아예 멈춘 것만 같았다.
방 안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누군가 비수를 든 채, 소리 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